이번 분기에 읽은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 오오쓰카 에이지의 [이야기 체조]와 [캐릭터 소설 쓰는 법]. 이 중에서 뭘 제출할까 고심하다가 합쳐서 짤막하게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간단히 적는다.
1) 악의 / 히가시노 게이고
동네 도서관에 없는 책을 동생한테 빌려다주러 예전 동네 도서관까지 갔다가(우리 집에서 버스로 50분), 한 권만 빌리기 억울해 오랜만에 일본 추리소설이라도 읽을까 하던 차에 믹님께서 일전에 독서스터디로 제출하셨던 게 기억나서 빌려왔다. 책이…무지하게…낡았다…(첫인상) 인기있었던 책이라는 증거.
히다카 쿠니히코와 노노구치 오사무, 오랜 친구이면서 동료 작가이기도 한 이 두 명과, 노노구치의 후배 교사였지만 지금은 형사가 된 카가 쿄이치로 세 사람의 이야기인데, 놀란 점은 유행이 한참 지났다고 생각한 수수께끼풀이 중심의 전개를 보인다는 거였다. 명탐정퀴즈풀이 44선 < 이런 제목의 책(타이틀은 노란색이어야 한다)에 자, 그럼 범인은 어째서 살인을 저지른 걸까요? (정답은 P.199에) 라는 식으로 제시될 법한. 의아해하다가 작가해설에서 끄덕끄덕. “비밀이나 암호처럼 추리소설의 이른바 고전적인 ‘소도구’가 마음에 들어서, 가령 한물간 유행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계속 활용하고 싶다” 그래서 클래식 탐정소설들이 연상되었던 거군.
작가의 다른 책 [용의자X의 헌신]도 그러고 보니 그런 전개였던가? 용의자X같은, 깊이 동감할 수 있는 인물에게 푹 빠지는 재미를 바랐기 때문에 조금 김빠지긴 했지만 역시 인기작가다운 필력으로 한달음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여러 명의 증인이 증언하는 챕터는 각자의 목소리가 뚜렷이 들린다는 점에서 감탄. 처음부터 독자를 속였으면서도 시치미떼는 작가에게도 감탄.
그러고 보니 히가시노 게이고가 떠오른 건 그 전날 읽었던 오오쓰카 에이지의 책에서 언급되었던 탓도 있는데, 책을 빌려줘서 적을 수는 없지만 대충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류의 소설을 쓰려면 자료를 소화하는 학습능력도 중요’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 책은 바로↓
2) 이야기 체조 / 오오쓰카 에이지
이야기 쓰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야심찬 책. 이 책의 저자는 정치사회학 쪽으로도 폭넓은 저술활동을 하며 또 오래 일한 카도카와쇼텐을 까는 솜씨로 보아 굉장히 삐딱한 사람인 것 같다ㅋㅋㅋ 하이텔 애니동에서부터 눈팅해온 선정우님께서 번역하고 활발하게 트위터로 소개하셔서 더 관심이 가기도 했다. 현재 ㅅ님에게 대출중. ㅅ님의 감상을 기대하고 있는데, 기존 작법서와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 작법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문예 비평이나 현대사상을 공부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소설가가 되고 싶을’ 뿐이니까.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응용 가능한 이론 외에는 가르치지 않는다.” 이게 이 책의 기본이념. “표절이란 원래 그렇게 돌고 도는 법이다.” 다른 작품을 표절한 자신의 작품을 또 다른 드라마에서 표절한 것을 언급하며 한 말.
하지만 표절을 가르친다-행한다는 건 아니고. 그보다는 이야기의 원형을 파고들어 그 원형을 뼈대로 삼고 완전히 다른 살을 붙여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이다(일전에 닐 게이먼에 대해 언급한 것과 일맥상통. 오오쓰카의 이론대로 닐 게이먼을 분석하자면 그는 신화-설화-동화의 기본 얼개 중 하나인 ‘주인공이 모험에 임함-위기-시험-극복-성장’을 현대적으로 요리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 오오쓰카가 가르치는 대로 한다고 시나리오를 쓰게 되는 건 아니다! ㅋㅋ 어쨌든 자기가 원하는 살은 자기가 골라야 한다. 본문에도 나오는 얘긴데 어렴풋한 기억으로 더듬어 보자면 뭘 쓰고는 싶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수많은 작가지망생들을 위하고 싶었다나, 그렇다. 오오쓰카는 원하는 모든 이가 스토리를 쓸 수 있게 되는 것을 진심으로 목표로 하고 있고, 절대 정통파 학습법은 아니지만 그 목표에 나도 찬성하고 싶다.
“만약 어떤 시대의 훌륭한 작품들이 동일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것을 깨달은 누군가가 그 작품들의 동일한 이야기 구조를 정밀하게 추출한 뒤 새로운 표층을 덧붙여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 낸 다음 시치미를 뚝 떼고 동시대 문학의 일가를 점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이 이 책의 목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 “그런데 ‘2차 창작’이란 표현은 오리지널이 그저 소재일 뿐 창작의 주체는 본인이라는 요즘 동인지 작가들의 사고방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오리지널’의 특권성을 의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2차 창작’을 특권화하려는 생각은 없다.” 이 얘기는 매일 타임라인에서 2차 창작을 보는 나로서는() 신선한 관점이었다. 확실히 오리지널에 대한 존경심의 총량이 많이 줄어든 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은 든다.
3) 캐릭터 소설 쓰는 법 / 오오쓰카 에이지
위 책을 읽고 다른 저서도 읽고 싶어져서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이 책은 이야기 체조만큼의 임팩트는 없었고(이야기 체조에 너무 놀라서 그런가?) 오히려 평범한 작법서라는 인상을 받을 정도였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라고 생각하면서 보고 있다가 뒤쪽에서 뒤통수. 9·11 테러에 관련하여 미국이 어떻게 이야기를 꾸며 자신을 주인공화하고 뉴스를 보는 세계 시민=관객들에게 영화같은 전쟁을 보여주었는가를 설파하는데 대박. 이 사람의 다른 저서들도 읽어볼 생각이다.
지쳐서 이번엔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