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21분 전에 집에 달려들어와서 쓰기 시작한다. ㅋㅋㅋㅋ 이러다간 형광펜으로 줄친 부분만 타이핑해도 시간이 부족하겠어!
레이먼드 챈들러의 서간집. 책을 발견한 건 친구의 감상문. 감사하게도 이북으로 있길래 리디북스로 빠르게 구입, 하지만 읽는 데는 사나흘 걸렸다.
챈들러는 필립 말로 시리즈로 유명한 추리소설가이면서, 스티븐 킹이 작법서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주구장창 문장을 칭찬한 작가이기도 하다. 킹이 하도 칭찬해서 챈들러의 책을 보긴 한 것 같은데 기억이 희미하던 차에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호기심이 생겼다.
특이한 점은 원서가 없다는 것. 국내에서 챈들러의 서간을 선별하여 편집하고 번역한 것으로, 엮은이이자 옮긴이인 안현주씨는 챈들러의 팬인 것 같다. 는 ‘것 같다’는 구문을 붙일 필요도 없어 보인다. [레이먼드 챈들러를 기리며]라는 제목의 옮긴이 서문에서 눈부신 팬심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라는 방패를 집어던진 있는 그대로의 챈들러는 신랄하지만 정의롭고, 까다롭지만 합리적이며, 지적이지만 낭만적인 사람이고, 그런 챈들러는, 자신이 창조한 탐정 필립 말로보다 더 매력적이라 단언하겠다.” 독자들에게 자신의 챈들러상을 보여주기 위해 집요하게 편지를 고르고 순서를 정하고 번역하셨을 엮은옮긴이분의 챈들러 사랑에 찬사를 표하고 싶다. 그 덕심 이해합니다
책은 서문-작품론(흔히 말하는 창작지론)-작가들(다른 작가들에 대한 평가)-할리우드(에서 느낀 점과 경험담들)-필립 말로(에 대한 얘기)-일상-편집부 후기로 구성되어 있다. 즉 책 제목에 관련된 내용은 약 20%. 챈들러의 작법서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좋은 책이다. 챈들러 특유의 건조하고 삐딱한 문장은 편지글에서도 여전하고, 여러 대상에 대해 재치와 기지가 빛나는 글을 쓰고 있다. 읽는 것이 즐거웠고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요즘 세상이라면 블로깅해서 인터넷이 닿는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었을 테고 그게 좀 아쉽지만, 편지라는 매체는 쓴 사람의 체취가 느껴지는, 복사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니까. 편지를 보관하며 즐거움에 젖었을 수신인들(특히 필립 말로에 대한 엄청난 분량의 분석편지를 쓴 듯한 어느 영국팬은 챈들러의 답장을 대대손손 물려줬을 법하다)을 생각하면 그 편지들의 유일한 독자였을 그들이 참 부럽다.
현재 마감시간 13분 전, 급히 감상문을 써내려가다 마음에도 없는 손에 익은 문구들로 의미없는 바이트를 낭비하고 싶지는 않고 이 책이 마음에 들기도 하기 때문에, 급하게 제출해 두고 추후 추가한다. 감상문 하나를 쓰는 데도 한 시간은 생각해야 하는 것 같다. 문장을 어느 정도 정돈하고 의도한 의미가 전달되도록 고쳐쓰는 데만도 제법 시간이 걸린다. 오타도 급히 쓰려니 왕창 나더라…오타가 난 포스팅을 공개한 채로 두는 것은 마치 속바지 없이 짧은 치마를 입고 지하철역 계단을 한없이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라, 제출한 후 서둘러 고쳐써서 다시 포스팅한다. 는 이제까지 고쳐쓴 분량은 위↑의 것이고 이 아래는 형광펜을 쳐둔 나머지 부분에 할애한다.
―작품론
- 그래서 나는 항상 초고란 날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안에서 살아 있는 듯 보이는 것이 이야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깔끔함을 잃더라도, 스스로 일어서 걸어가는 효과를 지닌 것들은 계속 유지하려고 하지요.
- 스타일에 대한 투자는, 성과는 느리고, 에이전트의 비웃음과 출판사의 오해를 살 겁니다. 그러다 서서히 당신이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겠죠. 글을 쓰면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작가는 항상 성공할 거라는.
- 독자들에게 기억되고 각인되는 건 이를테면 한 남자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죽음이 닥친 순간, 그는 매끄러운 책상 위에 놓인 클립을 집으려고 책상 위를 긁고 있었고, 클립이 자꾸만 미끄러져서 불만스러운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으며, 그의 입은 고통스럽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반쯤 벌어져 있었고,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이 죽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 (자신의 작품을 표절한 작가에 대한 편지에서) 설사 내게 그런 행위를 막을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이 주어진다 해도 어디에 딱 선을 그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작가의 스타일까지 훔칠 수는 없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 작가한테 그럴 스타일이 있다면 말이지만. 대개는 누군가의 결점만 훔칠 수 있을 뿐입니다.
- (역시 위 편지에서) 히긴스 씨를 응원하고 싶군요. 어느 지점까지는 연료를 좀 빌려 쓰고 가더라도, 언젠가 자기 속의 걸 태워서 스스로 탱크를 몰아야 하는 날이 올 테니까.
- (글을 쓰는 원칙에 대하여) 첫째, 글을 안 써도 된다. 둘째, 대신 다른 일을 하면 안된다.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 애초에 작가한테, ‘독자는 신경 쓰지 마라. 그저 쓰고 싶은 것을 써라’라고 조언한 멍청이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작가도 무언가를 ‘쓰고’ 싶어 하지 않아요. 어떤 효과를 재연하거나 표현하길 원하지요. 다만 시작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할 뿐입니다.
―작가들
- (서머싯 몸에 대하여) 그는 외적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따뜻함 같은 것이 결여되어 있는 동시에 워낙 현명해서, 대부분의 우정이 아무리 피상적이며 돌발적이라 해도, 그것들 없이는 삶이 너무 우울하다는 점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죠.
- (헤밍웨이에 대하여) 챔피언도 자기에게 있는 무엇을 순간이든 영원이든 잃어버릴 수 있고 장담할 순 없어요. 하지만 챔피언은 더 이상 스트라이크 존에 높고 빠른 공을 던지지 못할 땐, 자기 심장을 대신 던집니다. 무언가를 던지죠. 그저 마운드를 빠져나가서 울어 버리지 않아요.
- (역시 헤밍웨이에 대하여)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의 단점, 나아가 비극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점은, 그들에겐 엄청난 활력이 필요하며, 불행히도 그 활력에 대해 불타는 관심을 간직한 채로 자신의 활력을 잃어 가게 된다는 것이죠.
- (딕슨 카에 대하여) 하지만 글쓰기를 싫어하는 작가라니, 말로써 마법을 창조하는 일에서 어떤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작가라니, 그런 사람은 나한테는 작가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할리우드
- 할리우드가 세상의 모든 글재주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할리우드식으로 그들을 파괴해 버린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애초에 할리우드가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건 할리우드가 돈을 제대로 지불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 (할리우드에서 맺은 계약을 취소하기 위한 일인시위에 대하여) 내가 실제로 운용할 수 있는 시간은 몇 년 남지 않았고, 나는 그 시간을 내가 가진 재능을 말살하는 데 쓰고 싶지 않아요.
- 글 그 자체에 집착하는 건, 좋은 영화에는 치명적인 일입니다. 영화는 글을 위한 매체가 아니에요.
- 작가란 언제나 한 시간이면 자기를 뭉개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조직과 맞서고 있지요. 그러니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이 그들에게 줄 무언가를 갖고 있을지도 모르니 자신을 뭉개버리는 건 실수라고 그들을 납득시키는 것뿐입니다.
―필립 말로
- 주변을 둘러보니 멜로드라마가 그나마 정직하면서, 누군가의 노선도 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 필립 말로와 나는 상류층 사람들이 욕조에 몸을 담그고 돈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경멸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그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는 그들이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 타락한 사회에서 괜찮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입니다. 불가능한 싸움이죠. 이길 수는 없어요.
―일상
- 별 생각 없이 쓴 얘기였습니다. 겉만 화려한 모든 슬릭 소설들처럼 인위적이고 진실하지 않으며, 감정적으로도 정직하지 못했어요. (중략) 그 와중에 내 가장 오랜 친구 하나는 그 이야기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편지를 수고롭게 두 장이나 써 보냈더군요. 당신도 같은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얼 하든 간에 뺨을 철썩 맞는 거죠. 그것도 대개는 예상치 못했던 각도로 말입니다.
- 고양이가 타고난 천성에 따라 반쯤 죽어 가는 쥐에게 무기력한 탈출 시도를 반복시키며 노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도 없을 겁니다. 우리 고양이를 내가 존경하는 이유는 이런 악마적인 가학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 우리 강한 남자들은, 마음만은 어쩔 수 없는 감상주의자들이니까요.
- 이 나라는 호황의 정점을 찍고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벌고 있고, 그 모든 사람들이 할부를 갚느라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죠.
- (아내가 죽은 후 챈들러에 대한 의사의 소견) “(전략) 당신은 혼자 살 수 없고 혼자 살아서도 안 돼요. 혼자 살게 되면 불가피하게 술을 마실 테고, 그 술이 당신을 병들게 할 겁니다. 당신이 한 여자랑 살든 스무 명이랑 살든 나는 전혀 관심 없습니다. 그저 누군가랑 살기만 한다면. 그게 내 절대적인 소견입니다.”
나는 그 사람이 지독하게 똑똑하다고 생각해요. 그토록 부드럽게 나를 찢어 놓다니. 그렇게까지 꿰뚫어보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아릿한 문장도 많고 아름다운 표현도 많아서 원문으로 보고 싶은데, 편지를…원문으로…무슨 수로 찾아서 보지? 라고 괴로워하며 별 생각없이 구글링해 봤더니 아마존에 있다…두 권이나 된다…아싸.
+부록
이 책은 EBS 영미문학관 마지막회에 소개되어 여러 성우분들이 낭독해 주셨다는데(TTS와는 다른 성우분들의 파워…귀가 씻겨져 나가는 것 같다 크흐) 거기서 구자형씨가 ‘챈들러 스타일’을 낭독하셨다고 한다. 유튜브에 있어서 들고 옴.
이건 정훈석씨가 낭독하신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에 대한 편지. 챈들러의 고통이 전해진다.
그리고 구자형씨가 통째로 낭독하신 카카오페이지의 오디오북도 있다
+부록(2)
그리고 이 서간집을 번역하신 분의 블로그를 찾았다. 이 쪽으로 오시면 부끄러우니 링크는 걸지 않는다. http://blog.naver.com/mailto_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