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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문체가 뿜겨서 접습니다.

추리소설은 좋아하지만 셜록 홈즈,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 렉스 스타우트, 도로시 세이어스에 식성이 편중되어 있다. 그러니까 탐정의 역할이 구식이랄까 전형적이랄까, 외부의 탐정이 사건에 개입해서 해결하는 것에 익숙하다는 얘기다(따라서 말타의 매나 빅슬립 등은 조금 취향 밖. 콜롬보는 재미있게 읽는 정도. 87분서는 한 번 꼭 읽어보고 싶지만 국내에서 찾기가 힘들다. 제길 영어!!). 하지만 이런 타입의 추리소설에 약점이 있다면 소설의 중심이 되는 범죄가 주인공=탐정의 인생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 탐정은 그저 외부의 방관자(때로는 두뇌게임을 즐기는 게이머, 때로는 돈이 필요해 절박한 고용인, 어쩌다가는 중매인-이건 포와로와 미스 마플이 대표적)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 따라서 독자는 추리를 즐기는 위치 이상은 이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탐정의 위치에 대한 이 문제에서 [밀레니엄]은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낸 것 같다(이거 짱 번역체인 거 나도 안다…). 주인공들은 전업 탐정은 분명 아니지만 독자가 매우 납득할 수 있는 이유로 사건에 뛰어들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책장을 넘길 수 있다. 독자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소설에 푹 빠져 있다가 ‘헐 얘 왜 이러는데?’ ‘여기서 이게 말이 돼?’ ‘이거 오타잖아!’하고 느닷없이 현실용 두뇌를 가동해야 하는 건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밀레니엄]이 좋은 소설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탐정들의 위치뿐 아니라 최초의 사건 언급, 캐릭터의 소개와 사건의 전개 위기 그리고 결말까지가 빠르고 매끄럽게, 어색하지 않게 서술되고 있다. 어색하지 않다는 것은 내 생각에는 꾸며낸 이야기들에 대한 두 번째로 대단한 찬사다(1순위는  재미있다). 읽는 동안 자연스러운=즉 거슬리지 않고 따분하지도 않은 소설은 잘 닦인 도로를 스포츠카로 달리는 것처럼 시원한 오락을 제공한다. 반대로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는 순간이 많을수록 독자는 책을 덮을 기회가 많아진다. 책을 집어던지거나 중고서점에 내다팔거나 블로그에 책값을 아까워하는 포스팅을 할 기회도 그에 비례해 많아지고 말이지.

주인공 두 명은 스웨덴의 국민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소설 주인공들, 수퍼 블롬크비스트와 말괄량이 삐삐에 바치는 헌사라더라(본서 주석 참조함). 최근 읽은 소설작법책에서 고전의 캐릭터들을 빌려라! 고 충고하던데, 라르손은 그것을 훌륭하고 재미있게 해냈다. 수퍼 블롬크비스트는 이 책에서 처음 알았으니까 접어두고, 리스베트는 정말 현대 성인판 말괄량이 삐삐 같다. 난 여자지만 미카엘은 음 좋은 남자군 하고 호감만 가진 채로 패스했고 리스베트가 흥미로운 캐릭터로 인상에 남았다. 하권 십여 페이지를 남겨두고서 리스베트가 (삐-)하고 (삐-)(삐-)해서 (삐-)할 시간이 없잖아! 이거 이 분량으로 어떻게 해결할 거야! 속태우면서 우다다다 넘기다가 결말 보고 축☆탈력했을 때의 그 기분이란…하지만 다음 권을 기다리게 한다는 점에서 그레이트’-^b

메인 사건은 대담하게 생략☆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조심스럽다. 하나만 말하자면 이 소설이 내가 사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좋았다는 거. 솔직히 스웨덴의 개방된 성풍조에는 놀랐고(내가 구시대적인가 어흑) 모 컴퓨터메이커가 자주 등장해서 웃었고, 여러 모로 지금 이 시대를 오목조목 살려낸 것으로 보인다. 검색엔진 등 하이테크가 태연하게 쓰이는 것도 재미있었다.
지금 서점에 깔린 책 중에서 10년 후에도 재미있게 읽힐 책은 10%쯤 될까말까 할 거다. 다음 세기로 넘어가는 책은 몇 권이나 될까? 세월이 흐르면서 책은 걸러지고 걸러져, 극소수의 책만이 미래의 독자들에게 고전으로서 남는다. [밀레니엄]이 고전으로 남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최소한 21세기의 첫 10년 동안의 스웨덴을 보고하는 재미있는 소설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 렛츠리뷰를 신청할 때 북구이름 좋아요 하악하악 이따위 감상으로 신청을 했는데, 역시 그랬다. 미카엘 리스베트 헨리크 고트프리트 등 북구식 이름들에 마냥 하악대며 읽었다. 그 중 최고는 하리에트! Harriet이 하리에트라는 우아하고 귀여운 음으로 읽히는 스웨덴에 감격했다. 해리엇이라고 하면 웬지 뚱뚱한 가정부 같은 느낌이 든다그^.T_M#] 여기는 책과 상관없는 잡담.
+ ‘어른들을 위한 해리포터’라는 광고문에 시비걸고 싶지는 않지만 그놈의 해리포터…How to Write Science Fiction & Fantasy가 ‘당신도 해리 포터를 쓸 수 있다’는 제목으로 나오는 세상에 절망했다! 본문에는 빗자루 끄트머리도 안 나온다구!
+ 렛츠리뷰에 트랙백하러 갔다가 확인차. 제가 아무래도 리뷰 신청서 쓰다가 오타를 냈나 본데 o’clock TV이 아니라 o’clock TV가 맞습니다.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