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이 동문 타과 선배분의 유학준비 포스팅들을 소개하고 싶다. 이 분은 홍대 재학중 아트센터 그래픽디자인으로 편입한 케이스로 비예술전공자/신규입학이었던 내 케이스와는 다르지만, 미국 미대입시 준비를 토플/포폴/서류접수/합격후절차 등으로 나눠 요점을 딱 정리해 두셨다. 토플/서류접수/합격후절차는 다 위 포스팅만 보셔도 된다! 진짜로.
내가 입시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건 포트폴리오 쪽이니(토플은 두세 달 걸려 최소점수 80점을 맞출 수 있었다) 이 포스팅에서는 그것만 딱 쓰기로 한다.
포트폴리오는 사실 뭘 해야 하는지 종잡는 데만 엄청난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애초에 나는 작화력이 불꽃같이 튀는 타입의 만화가가 아니란 말이다…미술입시란 걸 해본 적도 없고…그런데 미국 미대는 정통파 회화를 중시하는 곳 아닌가? 만화체 그림은 안 먹히지 않을까? 어떻게 그려야 하고 얼마나 잘 그려야 하나? 라는 의문이 포폴 준비 초기에는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accepted portfolio로 구글하면 나오는 포폴들은 막 전위적이고…현대회화같고…가끔 되게 못생겼고…(죄송합니다) 조각도 해야 하고 콜라쥬작품도 해야 하고 칙칙한 색깔들로 막 물감 뿌리고 흘리는 자화상도 그려야 합격하는 건가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상담받으러 찾아간 유학원 서너 군데에서 이구동성으로 당신의 만화그림은 포폴에 쓸 수 없다고 잘라 말한 것도 혼란에 한몫을 했다. 나는 만화밖에 못 그리는데 그럼 포폴에 뭘 넣어야 한단 것인가?
유학원의 공포유발 발언(“이대로는 합격 못하십니다”)에도 불구하고 나는 깊은 고민 끝에 유학원에 등록하는 대신 혼자서 포폴을 준비하기로 결심했는데, 큰 이유는
1) 학원비가 상상을 초월하게 비쌌음(1주 3회, 1회 5-6시간 수업에 월 2-300만원쯤이 평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2) 유학경험이 있는 친구와 지인분들이 모두(말 그대로 전원이) 그만큼 그릴 줄 알면 선생님들은 너 말고 다른 학생들을 우선해서 봐줄 거다, 돈이 아깝다고 조언해 줌
덕분에 학원비를 안 내고 합격했습니다…소중한 친구들과 지인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그렇다고 유학원이 도움이 안 된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고. 결국 입시는 정보싸움이니, 유학원에 있었다면 이제까지 합격/불합격한 포폴들에 대한 정보들을 분석해 이건 하고 이건 하지 말라는 가이드를 받을 수 있었을 거고, 그렇게 만든 포트폴리오가 학교의 입맛에 딱 맞았으면 장학금을 더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국 사립미대들의 학비는 원래도 미쳤었지만 최근에 더욱 미치기 시작해 학기당 2만달러를 넘는 곳이 흔해져 버린 만큼 무조건 장학금을 많이 받는 게 최고다. 얼마가 나올지 모르는 장학금을 위해 유학원비를 투자한다/안 한다는 선택은 둘 다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장학금 얘기가 나왔으니 여기 맥락없이 끼워두자면 최종적으로 내가 오퍼받은 장학금은 아트센터 일러스트레이션 학부 $6000, 오티스 디지털미디어 학부 $6000, MCAD $6000, LCAD $6500였다. 만화그림이 섞여있어도 합격과 장학금은 가능하단 결론이다(참고로 유학원들이 합격생 명단에 $48000, $72000 장학금 받음 이라고 적어둔 건 보통 8학기 기준이다. 그 계산법으로라면 나는 $48000만큼의 장학금을 받은 셈이다).
아래는 그렇게 혼자 낑낑대며 포폴을 만들기 위해 내가 한 것들이다.
1. 서울 내에서 갈 수 있는 크로키 클래스들을 가능한 한 많이 수강
전에 내가 다녔던 크로키 클래스들을 엑셀파일로 정리해 트윗한 적이 있는데 트윗클리너를 잘못 돌려 삭제해 버렸다.; 기억나는 걸론 압구정 아트필 유학원의 크로키 수업, 우만연 크로키, 이태원의 잔쿠라 아트스페이스 누드크로키에 거의 매주 갔던 것 같다.
최종적으로 포트폴리오에 넣은 크로키 관련 페이지들은 이렇다. 잉크로 실루엣을 따고 화이트마커로 선을 잡은 네 번째 그림은 아트필에서 옆자리 학생이 보고서 자기도 해보겠다며 갔던 기억이 난다.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 포토샵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준비중에 들었는데(그 결과는 다섯 번째 그림의 액션라인을 컬러로 잡은 편집 같은 것) 포폴을 멋지게 디자인하는 것 자체도 능력치로서 인정받는다고 한다.
(아트센터에 오면 매 학기 이 짓을 해서 장학금심사를 받을 수 있다…)(빡센 경험이었던지라 잠깐 아련해졌다…이건 추후의 학교소개 포스팅에 적겠다…)
2. 취미미술학원에서 개인작 작업
입시경험이 없다 = 정통회화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수채화든 유화든 파스텔화든 해봤을 리가 없지…하지만 누가 가르쳐주기만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는 배짱으로 취미화실을 뒤졌다. 위치와 비용과 가능한 수업시간 등등을 따져서 결정한 곳은 숨스페이스로, 여름밤 늦게 맥주와 과자를 까고 둘러앉아 수다를 떨 수 있는 화기애애한 곳이었다. 참고로 이곳은 1대1 커리큘럼으로 완전히 취미미술에 집중해서 가르치는데도 어쩐지 나처럼 유학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슬금슬금 끼어들어 있었고, 내가 다니던 중에도 벨기에 어느 대학에 합격하신 분이 이별의 술자리를 가지셨었다. 그 때쯤에 선생님들께서 이제 유학미술하는 분은 정말 진짜로 안 받을 거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워낙 좋은 선생님들이셨어서 그 후에도 유학준비생들이 모여들지 않았을까?
여기서 작업한 것들 중 포트폴리오에 실은 작품들은 아래와 같다. 왼쪽부터 파스텔, 유화, 파스텔, 오일파스텔. 파스텔로 골판지상자 종이에 하늘을 그린 건 더 있는데 스캔해둔 걸 못 찾겠네.
3. 연재작에서 되도록 근사한 페이지들 골라내기
시티오브플라워 페이지들만 고른 건 세실고 배경은 어시분들이 도와주신 부분이 많아서다. 당시에는 여전히 유학원의 냉랭한 반응에 움츠러들어 있어서 세실고 표지작업을 넣기를 주저했지만 지금 한다면 다 넣지 않을까 싶다.
4. 스케치북 채우기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그림을 숨쉬듯 그리는 다작 타입은 아니어서 여러 학교에서 필수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스케치북에 엄청 고통받으며 백지들을 채웠다. 칼아츠는 스케치북 한 권을 통째로 제출해야 하고 아트센터는 스캔/편집해서 10페이지 이하로 보내야 하고, 학교마다 다르다. 그러고 보니 칼아츠 보냈다가 낙방하면서 돌려받은 스케치북이 창고 어디에 있을 것 같은데…
이 때는 내가 만화원고를 할 때의 얼굴 데포르메 말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자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좋은 경험이었고 이 때 하던 짓(첫 장의 컷나눠서 아무거나 채우기라든가 아래 장의 한 페이지를 쉐이프로 채우기 같은 것)을 지금도 재미로 하고 있다. 여기 업로드한 페이지는 전부 실제 대상들을 보고 그린 것들로, 결과적으로 실력향상과 재미에 도움이 됐지만 남들 다 보는 바깥에서 철면피를 깔아야 한다는 점에서 하드코어한 연습이었다.
5. 미술작법서 읽기
삭제된 버전에서 이 부분을 빼먹었더라. 미술작법서를 많이 읽었고 특별히 도움이 된 것은 베티 에드워즈의 오른쪽 두뇌로 그림그리기, 마이크 마테시의 포스드로잉이다. 내 생각엔 도움이 되는 작법서란 것은 딱 자기가 이해할 레벨에 도달하고 필요를 느끼는 타이밍에 만나는 운명적인 책인데 이 두 권이 당시의 내게 그랬다.
6. 코리아 포트폴리오 데이(KPD) 참가
KPD는 한국미술진흥협회(라는 이름의 사설협회, 국립 아님)에서 주최하고 해외 미대들의 입시담당자들이 출장나와서 포트폴리오를 리뷰하는 행사다. 나는 13년과 14년에 참가했다. 13년은 지하강당의 칙칙한 공기 속에서 바닥에 앉아 대기해야 하는 끔찍한 행사였지만 14년에는 행사장을 바꿔 최소한 지상강당의 맑은 공기 속에서 바닥에 앉아있을 수 있었다. 입시담당자들이 실제 입시에서 포트폴리오 심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학교 관계자들에게 포폴을 보여주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는 것 자체가 자신감을 주기에 나는 긍정적이다. 그런데 지금 KPD 홈페이지를 다시 보니 2018년에 참가한 학교들이 14년보다 훨씬 적잖아? 요즘은 별론가?
7. 구글링, 구글링, 구글링
준비기간 동안 거의 하루에 한두 시간은 꼬박꼬박 미대 합격 포트폴리오들을 구글링하고 입시 관련 포털 글들을 읽으며 보냈다. 데비앙아트, conceptart.org, CGSociety… AnimatedBuzz라고 주로 칼아츠 입시생들이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포털사이트가 있는데 여기에도 괜히 로그인해서 동질감을 느꼈었고. 영어가 좀더 능숙했다면 트위터나 페이스북이나 등등에서 입시생들을 좀더 발견해 얘기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때 다른 사람들의 합격포폴에 도움받은 만큼 나도 돕고 싶어서 나중에 내 합격 포폴을 텀블러에 포스팅했는데, 그게 art center accepted portfolio라고 구글링하면 한동안 맨 위에 떴던 모양이다. 그 후로 신기하게도 매 학기마다 신입생 한 명은 내 포트폴리오가 도움이 많이 됐다며 말을 걸어와서 구글신의 힘을 체험할 수 있었다.
포트폴리오 얘기는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다음 포스팅은 이렇게 만든 포폴로 합격한 학교들 중 최종적으로 선택한 아트센터에 대해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