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학기 다닌 학교 얘기가 너무 길어서 여기서 마무리를 하려니 뭔가 호흡이 이상한 것 같지만, 고민하다 일단 이 포스팅으로 유학편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럼 여기서 유학생활 정리!
1. 유학으로 얻은 것
사실 유학을 결정했을 당시의 나는 취업과 유학의 관계를 전혀 이해 못하고 그냥 유학을 가서 잘 배워서 잘 그리게 되면 취업되는 거 아닌가??? :D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잘 그린다와 취업된다 사이의 큰 간극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유학생활 1년만 해도 잘 그리는 유학생이 취업되는 것과 잘 그리는 내국인이 취업되는 것의 난이도가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된다…아, 이건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그 간극 사이에 있는 것은 언어, 인맥, 그리고 취업허가인데, 이것을 유학으로 상당부분 메꿀 수 있기 때문에 해외취업의 전단계로서 유학이 선호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1) 언어: 내 영어 실력 소개를 하자면 전형적인 입시위주 영어교육을 받은 평범한 한국인으로, 독해는 꽤 하지만 나머지는 절망적이었다(토플은 쉽게 땄으나 토플과 일상생활용 영어회화능력 사이에는 그다지 교집합이 없다…). 따라서 입학시 내 영어실력은 참담한 수준으로 앞서 포스팅에서 말했듯 필수 영어수업 반편성에서 최저레벨로 편성된…^^ 귀중한 학비를 영어 때문에 낭비하며 피눈물을 흘린…^^ 정도이니 대충 짐작이 가지요. 하지만 학교에서 영어로 부대끼다 보니 짬도 생기고 배짱도 생겨, 4학기부터는 조교도 뛰고 6학기에는 오리엔테이션 리더로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명회에 참여도 할 있을 만큼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 3년이 없었다면 졸업 후 영어로 직장생활을 무난히 꾸려나갈 수 있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시는 분들도 많고, 미국에서 몇 년을 지내도 영어대화를 극도로 꺼려해 영어가 전혀 늘지 않는 분들도 가끔 있으니 이건 케바케라 하겠다.
2) 인맥: 미국 하면 칼같이 실력순으로 사람을 고르고, 냉정한 객관적 판단으로 오로지 포트폴리오만 보고 사람을 채용하는 이상향일 것 같지만…전혀 아니다. 최소한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아는 사람의 추천이 크게 먹힌다. 스튜디오 내에 빈 자리가 생기면 공고를 내기 전에 팀 내부인원에게 누구 지금 당장 일 가능한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는 게 보통인 듯하다. 우리 회사만 해도 한 직장동료는 프로듀서의 스토리보딩 강의를 듣다가 채용, 다른 동료는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가 전에 같이 일하던 쇼에서 스카웃, 또다른 동료는 또또다른 동료가 친구라서 빈 자리가 났을 때 추천받아 채용…이런 식이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 인맥은 있어서 낙하산으로 채용된다는 시나리오도 없지야 않겠지만, 훨씬 더 자주 보이는 상황은 100만큼 잘 하는데 인성이 물음표인 사람과 85만큼 잘 하는데 내부인원이 인성을 보장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후자를 택하는 상황인 것 같다. 한 교수님은 이것에 대해 ‘미친놈이 아니라는 증거가 필요해서 그렇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한 후배가 그렇다면 모두와 친구가 되어야 하나, 수줍음 많은 성격으론 안될 것 같은데 어떡하나 물어온 적이 있는데 그건 또 아니고, 그냥 학교에서 성격파탄자로 소문나지만 않으면 되는 것 같다. 학교 다니면서 한 작업물이 좋았고 동급생과 평범하게 스몰토크 나누고 학교 로비에서 멱살드잡이만 하고 다니지만 않았다면 충분할 것이다. 내 첫 프리랜스 잡도 그런 식으로 3년 동안 수업 두 갠가 같이 듣고 얘기라곤 두세 마디 해본 게 다였던 반 친구 추천으로 얻은 거였어서 원래 추천이란 게 이렇게 먹히는 거구나 생각하게 됐다.
3) OPT(Optional Practical Training): 한국에서만 일해온 터라 잘 몰랐었는데(일본연재도 한국 출판사와 계약해 진행한 거라 계속 한국 내에서 일한 셈이 됨), 외국인이 미국에서 일한다는 것은 꽤 복잡한 서류절차와 추가비용을 요구한다는 것을 여기 와서야 실감했다. 미국외 거주자가 미국내 프리랜스를 하는 건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나, 외국인이 미국 내에서 풀타임으로 근무하고자 할 경우에는 취업이 가능한 종류의 비자 혹은 영주권을 갖고 있어야 하며 그를 신청하기 위한 자격요건(은 검색하면 나옵니다)도 까다롭고, 무엇보다 (셀프 페티션이 가능한 몇 가지 영주권에 해당하지 않는) 비자/영주권들의 경우 고용주가 한 달에서 몇 달에 이르는 서류작업과 몇천 달러의 비자발급비용을 감당할 정도로 나를 필요로 해야 한다. 보통은 비슷한 실력의 내국인을 고용하는 쪽이 고용주로선 시간 및 비용 면에서 훨씬 편리할 것이니 외국인에게는 그만큼 장벽인 셈이다.
그런 외국인 중 유학생에게 주는 기회는(미친 학비를 미국에 이만큼 퍼줬으니 이 정도쯤은 해주지 란 느낌이긴 한데) 졸업 후 1년간 그러한 비자 혹은 영주권 없이 자유로이 미국 내에서 취업활동 및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OPT이다(검색해보시면 아주 자세히 나옵니다). 바지런히 일해 비자를 위한 자격요건을 채울 수도 있고, 고용주에게 나를 고용할 시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증명할 수도 있는 중요한 기간이다. 내 주위의 유학생들은 이후 이 업계에서 계속 일할 수 있기 위해 이 1년간 미친듯이 일하고 있다.
이상이 보통 미국 학부유학시에 얻을 수 있는 것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학교의 덕을 입어 취업의 기회를 잡기도 했다. 우리 학교의 졸업전시회에는 디즈니, 드림웍스, 블리자드, 넷플릭스 등 대형회사부터 작은 스튜디오들까지 많은 리크루터들과 아티스트들이 업계진입희망자들의 전시를 구경하러 오는데, 졸업전시날 학생들의 명함을 가져갔던 아트디렉터가 4개월 후 배경아티스트를 찾고 있던 내 현 직장의 리크루터에게 그 중 몇 명의 연락처를 줬고, 나는 그 동안 20여 개의 포지션에 지원하는 족족 차이기만 하다가 여기서 컨택을 받아 인터뷰를 거쳐 구사일생으로 채용되었다. 학교에서 깔아준 판에 신세를 많이 진 셈이다.
2. 유학으로 잃은 것
은 1초만에 답할 수 있는데 우선 돈.ㅜㅜ
아주 진지하게 하는 얘긴데 미국 사립미대 유학은 정말 돈이 많이 든다. 내가 얻은 배움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학비를 생각하면 (일부 장학금으로 메꿨다고 해도) 이걸 하자고 이만큼을 썼어야 됐던 걸까?! 라고 스스로에게 반문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버전1을 쓰고 나서 보니 돈 문제를 자세히 언급하면 할수록 숫자에 마음이 차갑게 식을 뿐인 것 같아, 만화가 생활 동안의 내 저축은 깨끗이 털리고 부모님 도움도 많이 받았으며 취업을 못했으면 곤란해질 뻔했다는 것만 언급해 두겠다. :’) 미쳐버린 미대 학비에 대한 불만과 걱정의 목소리는 업계 내에서도 학교 내에서도 항시 있지만, 입학을 원하는 학생의 수요가 입학정원(공급)을 넘는 이상 이 학비가 낮아질 것 같지가 않아서 문제다.
시간과 경력도 잃었다면 잃은 것이고(저는 취직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3년간 새 작품이 없는 경력단절 만화가였으니까요) 무리한 학업과 밤샘으로 건강을 잃는 친구들도 많다. 유학시에는 이런 점들을 고려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 A에서 B, C까지 계획을 짜두시는 것을 추천한다.
3. 끝내기
전직 방구석만화가로서 유학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컸고 매일매일이 도전과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주로…멍청비용을 지불하면서…) 자신이 조금씩 생겼다. 하지만 이제 취업과 신분해결의 산을 앞에 두고 나는 간신히 숨쉬기 시작한 자신감을 시험당하느라 정신이 없다! 살려줘!
유학편은 이걸로 끝내지만 나중에 가능하다면 취업편도 작성하고 싶다. 현재진행형이라 글 작성은 아주 느릴 예정이지만 실시간 업데이트는 트위터에서 할 수 있으니까 괜찮겠지.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나처럼 삼십을 훌쩍 넘어 유학을 생각하시는 분들과 아트센터를 유학처로 염두에 두신 분들, 그리고 미국 애니메이션계 진출을 노리시는 분들께 끝없는 행운을 빈다. 이 세 집합의 교집합에 계신 분께는 특별히 더.
4. 에필로그

현 스테이터스: 만 37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백그라운드 디자이너(경력 1년 미만) 및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가끔), OPT 만료임박. 과연 햇조는 무사히 이 업계에 정착할 수 있을 것인가? 내년 아니면 후년쯤에 삼십줄 만화가의 취업기(가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