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과 아이패드가 항상 지척에 있는 요즘 세상이지만 머릿속에 있는 잡상을 토해내는 데는 역시 손으로 쓰고 그리는 게 편하다. 기기를 켜고 적당한 앱을 찾아 터치하는 그 짧은 찰나에 쓰려고 했던 것이 휘발돼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그런데 왜 노트를 찾아 펴는 시간 동안엔 생각이 머릿속에 얌전히 머물러 있는 걸까). 그래서 항상 책상에는 불렛저널 하나, 크고작은 스케치북 두어 권, 레터사이즈 종이들이 날아다니며 급한 메모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데, (보기에 지저분하다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바깥에 있을 때는 이것들이 없어서 메모도 드로잉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즐겁게 들고 다닐 만한 노트를 세팅하려고 최근 여러 가지를 시도해 봤으며, 거의 확정된 세팅은 이렇다.
- 호보니치 리필용 모눈노트, A6 사이즈, 알리익스프레스에서 구입
- 일본 개인공방에서 제작한 호보니치테쵸 커버, 오리지날사이즈, 야후옥션대행을 통해 구입



수많은 제품들 중에서 이것들을 선별하기 위해 거친 수많은 기준들은 다음과 같다.
- 모눈노트의 경우
- A5 사이즈는 들고 다니기엔 너무 크고 포켓사이즈(3.5*5.5인치)는 너무 작으니 A6(문고본) 사이즈가 가장 적당하다(미국/유럽 메이커 노트북들 대거탈락).
- 양페이지에 걸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쫙 펴지는 양장제본이어야 한다.
- 뭘 갈겨적을 때마다 평방센티미터당 얼마만큼을 낭비하는 건지 쫄지 않도록 권당 8000원을 넘지 않아야 한다. 사실은 권당 5천원 이하가 좋은데 미국에 있다 보니 양장노트라는 게 기본 9달러를 넘어버려서 타협을 해야 했다.
- 불렛저널 스타일이 가장 내게 맞았기 때문에 기존 스케줄러용 페이지가 일절 없는 노트여야 한다(호보니치테쵸, 지분테쵸, 그 외 스케줄러 노트들 탈락).
- 옅은 모눈무늬만 취급한다. 도트그리드라면 아주 옅지 않으면 안된다.
- 책 두께쯤 되는 노트에서 오는 안정감이 좋기 때문에 권당 80장 (160페이지) 이상이어야 한다(무인양품 A6 노트북들 탈락).
- 개인적으로 가죽노트커버를 따로 씌우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소프트커버여야 한다(하드커버 노트북들 탈락).
- 종이를 울리는 저주받은 손이라 종이가 최소 평당 90g 이상은 되어야 한다(미도리MD노트와 고쿠요 문고본노트 탈락).
- 이렇게 까다롭게 고른 모눈노트의 판매처는 어디…이 글 위에 있는 사진의 노트는 이쪽(105*142mm 크기로 A6보다 세로길이가 5mm 짧은 점 주의. 나는 미처 못 보고 주문함)이고 아래 노트는 이쪽(105*150mm, 특이하게 모눈크기가 3mm).
- 한편 노트커버의 경우
- 자주 쥐고 있을 것이다 보니 땀 많은 손에 쉽게 더러워지는 종이나 천 재질은 안되고 미끌거리는 비닐도 안된다. 가죽이나 PU가죽만 오케이.
- 펜홀더가 없으면 안됨.
- 회사 출입증과 명함, 신용카드를 다 넣고 다닐 생각을 하고 있었어서 최소한 카드포켓 1개.
- 잠금 때문에 고민 좀 했다. 그냥 덮이는 커버는 자칫하면 가방 안에서 다른 물건들에 쓸려 종이가 구겨질 수 있어서 피하고 싶은데 잠금이 있는 커버는(똑딱단추든 끈이든 벨트든 간에) 잠금을 푸는 데 한 번 더 손을 써야 하는 게 귀찮다. 누군가 이런 난제를 이미 해결해두지 않았을까 하며 엣시-알리익스프레스-라쿠텐-국내가죽공방들을 아는 언어를 총동원해 뒤지던 중, 자석잠금을 채용한 커버가 눈에 들어와서 이거다 하고 구입.
- 최종적으로 선택한 제품은 이것 (타이밍 좋게 사이즈를 잘못 주문한 구매자가 일본옥션에 출품했길래 그 쪽으로 저렴히 구입!)
노트커버는 막상 받아보니 완벽한 제품은 아니었다. 처음에 포장을 뜯어보니 웬 쥐포같이 바짝 마른 가죽껍질이 있었다…바느질은 꼼꼼한데 자석잠금이 1mm 어긋나 붙어있어서 딱 맞춰 닫히지 않고, 가죽이 두께가 없는 것도 아닌데 뭔가 맥아리가 없어서 앞커버가 좀 울지를 않나, 가름끈은 뒷면처리가 안돼서 좀 썼더니 끊어질 것처럼 뒷부분이 확 일어나고…투덜투덜…칼같이 재단하는 한국의 가죽공방들(헤비츠라든가 와나라든가)의 만듦새에 익숙해져서 기대치가 너무 높았나 싶다.
또다른 유력후보였던 영국의 공방 물건(이거 아니면 이거)으로 다시 주문할까 하다가, 자석잠금이 모든 다른 조건을 상회하는 데다 호호바오일을 전체적으로 발라주니 기름기있는 통통한 쥐포 레벨로 업그레이드해서 일단은 멋진 껍질을 노트에 입혀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가름끈은 연약한 주제에 쓸데없이 세 가닥이나 있는 걸 땋아서 강화했다).
오일을 바른 다음 날에 실수로 실험하게 돼버린 결과 호호바오일의 방수레벨은 물이 좀 튀어서 바로 닦아내면 멀쩡하지만, 가방에서 물통이 엎어진 상태로 장시간 방치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젖는 수준이었다(그건…무슨 짓을 해도 마찬가지겠지…) 그런데 그 물이 두어 시간만에 얼룩없이 사라진 건 가죽이 하도 바짝 말라있어서 그랬던 건지 뭐였던 건지 미스터리. 수분이 없기가 마치 내 피부같은 아이구나…

호호바오일 코팅 > 가죽용 왁스 코팅 > 호호바오일 코팅(2차)을 거쳐 약간 더 촉촉하고 튼튼해진 모습. 이렇게 열심히 가꿔주는 사이에 정이 들어서 자석잠금이 어긋난 정도는 눈에 안 보이게 됐다. 어이없다…

여기에 제트스트림 퓨어몰트+ 닥터그립 합체 멀티펜을 일단 끼워둠. 멀티펜은 좋아하지만 블랙으로 끼워둔 볼펜이(볼펜 중 가장 낫다는 제트스트림인데도) 계속 똥이 생겨 영 그리는 맛이 안 나서 택배가 오는 대로 노크식 시그노 겔펜으로 바꿔끼울 예정이다.

부족한 수납공간은 옛날에 사뒀던 미도리 지퍼포켓을 아주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고정해서 해결. 뭔가 새끈한 방법을 생각하고 싶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마지막 샷은 조만간 명함이나 포트폴리오 쪽에 쓰지 않을까…귀찮아서 업데이트 안 하지 않을까…하지만 이렇게 공개라도 해두면 언젠가 쓰지 않을까…하고 만든 개인 로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