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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센터에서의 첫학기가 끝났다.

이번 주 화요일 오후에 늦은 마지막 과제를 끝냈고 지금은 금요일 오후. 이 이삼일간은 널부러져서 바이클론즈와 아틀란티스(디즈니)와 MI5와 그레이브야드북을 보고/읽었고 지금은 소녀 수집하는 노인이라는 괴이한 제목의 책(원제는 이거 아님)을 읽고 있음. 14주 내내 뭘 흡수할 시간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역시 남의 창작물을 섭취하는 건 좋아! 아이고 좀 살겠네.

성적도 어제 나왔다. 총점 B에 간신히…정말 간신히 턱걸이해서 장학금을 사수했다(GPA 3.00=총점B 이하일 경우 경고, 두 학기 연속 3.00 이하일 경우 장학금은 바이바이). 하지만 이번 학기에 한 삽질과 지각과 결석(각막염)과 숙제제출지각을 생각하면 이 정도 점수를 받은 게 대견하다. 자비로우신 교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2015/10/31 추가: 디자인1 재채점으로 GPA 3.438로 업!)

빡세기로 악명높은 아트센터의 첫학기였고 확실히 커리큘럼과 과제양이 상당했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연재할 때도 주말은 없었으니 주말없는 사이클엔 익숙하고, 작업량은 음…1주일에 한 번 잡지원고 15페이지쯤 마감하는 수준이라면 가늠이 되려나? 좀 벅차지만 밥먹고 자고 하루 두어 시간 멍때릴 정도는 되는. 실제로 학교 다녀오면 몇 시간씩 인터넷 하면서 멍하니 체력회복에 시간을 쓰다가 느지막하게 과제를 시작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게 결과적으로는 내 성적의 목을 조르게 된다. 주6파는 이게 문제더라고. 6일 중 2일은 수업이 3시간짜리 하나씩뿐이었지만 고작 그거 다녀오는 것만으로 충분히 기력이 쇠해서 매일 오후를 정열적으로 과제에 바치는 게 불가능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주6파는 안 해봐서 몰랐다…

그래서 이번 학기의 비참한 시간표를 기록해 두자면

월: Head & Hands / ESL Basic
화: Design 1
수: Illustration Now!
목: Composition & Drawing
금: Perspective
토: ESL Basic

1) Head & Hands
R 선생님에게서 헤드와 손의 레이인을 배움. 과제량이 제일 많아서 일요일에 숨을 쉴 수 없게 만든 사악한 과목. 둘째주 숙제였던 헤드 레이인 150개는 와 진짜…난 결국 그 과제 다 못 채웠다^^ 그리고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외우게 만드는 과목은 싫어해서 더 버거웠다. 하지만 얼굴 잡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직접 체험한 후로는 암기도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목 길이를 가늠하는 법, 손의 부위별 두께를 배운 것도 굉장히 유용했고.
학점은 C+. 주말에 준비한 모든 삽질의 결과가 월요일에 몰아치는 바람에 점수가 난장판임(ex. 학교에 처음으로 차를 몰고 등교한 월요일, 내비를 보면서 운전한 게 처음이었던 데다 하이웨이 출구를 못 찾아서 40마일을 돌아 1시간 반 지각했고 마침 그 날이 퀴즈날이었다는 식의 불운이 유난히 이 과목에서 반복됨).

2) ESL Basic
놀랍게도 이 수업은 영어문법을 영어로 배우는 수업이다. 8 parts of speech(noun, pronoun, verb, adverb, adjective, preposition, conjunction, interjection)와 문장구조 엔지니어링을 무지하게 외웠다. 이런 건 의외로 또 한국에서 할 기회는 없는 수업이고, 언어에 대해 공부하는 건 좋아하기 때문에 즐겁게 들었다. 짧은글짓기를 하다가 선생님과 친해지기도 했고! 패스/논패스 과목인데 패스.

3) Design 1
조그맣고 하얗고 동그랗고 매콤한 B 선생님의 과목. 디자인에 대한 간단한 소개과목으로, 처음엔 이걸 뭐 어쩌라는 건지 몰라서 엄청 헤맸는데 뒤로 갈수록 이것들이 필요한 이유를 알게 되고 많은 것을 배웠다(요는 내가 보기에 고퀄이고 잘 나왔으면 디자인적으로도 좋다는 것이었다). 파이널 과제는 한 학기 동안 배운 것을 통틀어 우겨넣은 책 한 권을 만드는 거였는데 하필 파이널 전 주에 집주인에게서 30일 노티스를 받아서 집찾기+이사준비하느라 이 과제는 늦게 제출하게 됐다. 이 과제를 제외한 학점은 C. 더하면 점수가 얼마나 올라갈지 모르겠는데 C+이나 B-…? (과제 퍼센티지를 모름)

(2015/10/31 추가: 자비로우신 B 선생님이 B+을 주셨다!)

4) Illustration Now!
일러스트레이션과는 5개의 트랙으로 갈라지는데, 이 과목에서 각각의 트랙을 소개하고 졸업생들이 뭘 하며 먹고사는지를 보여준다(직접 와서 프레젠테이션한다). 내게 아트센터의 존재를 알려준 아티스트들 중 한 명인 엘사 챙이 온다고 학기초 스케줄표에는 나와 있었는데 일이 바빠 못 와서 땅을 벅벅 긁으며 통탄했었다…그냥 출석만 하고 얘기만 들으면 되는 수업이지만 학기말이 다가올수록 과제하다 지친 애들이 널부러져 잠들어 버리는 모습이 늘어난다. 패스/논패스고 역시 패스.

5) Composition & Drawing
해부학과 피겨드로잉…수업인 것 같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저 컴포지션(구성)이 정말 중요하다. 아니 솔직히 해부학과 구성을 같이 가르치다니 이거 커리큘럼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구성은 따로 과목 하나 터서 가르쳐야 되는 거 아닌가? 하여간 구성의 중요성에 대해 크게 눈뜨게 만들어준 과목이다. 성균관대에서 마이크 윙 교수님이 얘기했던 화면 내의 에너지의 흐름…이라는 것에 대해 좀더 알게 되었다. 또 레퍼런스를 쓰고 응용하는 걸 배운 것도 큰 수확.
아니 그런데 근육 이름 못 외우고 못 그리면 선생님께 개까이기 때문에 어쨌든 해부학 공부는 해야 한다. 사실 수업 커리큘럼상으로는 해부학>>>구성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우만연 해부학 수업을 들은 가닥으로 버텼지만 근육 이름(라틴어)은 계속 까먹고 있다. 제일 잘 한 과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수는 안타깝게도 A-. 아마 지각 때문인 것 같다…(거한 지각이 한 서너 번)

6) Perspective
조그맣고 귀여운 투시법 덕후 C 선생님의 과목. 이 과목은 그냥 대충 보고 소실점 찍어 그리는 게 아니라 전부 계산해서 그리는 법을 가르친다. 선생님은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투시법을 설명해 주시고 또 아주 잘 가르쳐 주시지만 너무나 이론적인 세상인 바람에 많은 학생들이 고통받는다…내 경우 계산하면서 그리다가는 완성되는 그림이 한없이 거지같아지는 게 겁나 장벽이어서 스트레스받다가 나중에는 아예 먼저 대충 그림 구도를 잡아놓고 투시법을 역산해서 수치를 추산해 새로 그렸다. 이 과목에서 그림자 드랍되는 걸 배운 게 최대수확.
학점은 A. 미드텀/파이널 만점 예이~

모아보자면 일러스트레이션과의 기본과목은 헤드앤핸즈/디자인1/컴포지션&드로잉/퍼스펙티브 네 과목인 셈인데, 한 학기를 마치고 슬근슬근 내 낙서를 해보니 이 과목들이 괜히 첫 학기 과목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컴드로잉과 퍼스펙티브를 같이 배우면서 입체감과 그림자에 대한 것을 확실히 알게 됐고, 그걸 헤드 그림자에 응용하면서 헤드의 구성을 다시 인식했고, 디자인1과 컴드로잉에서는 화면의 구성과 힘의 흐름을 알았다. 충분히 성과가 있는 한 학기였다.

학교외적인 생활은 어떠했냐면 삽질연속이었다. 입국하고 방 가구는 대부분 아마존으로 구입하고 하메님 모시고 가서 이케아 가구도 사오고 학교OT가고 통학 왕복 3시간 반에 기함해서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차를 구입하고 하메님의 소개로 알게 된 선생님에게서 독하게 운전연수를 받고 한 번에 붙으려고 왕복 2시간짜리 머나먼 DMV 가서 시험치고 한끗차이로 간신히 합격하고 선생님 소개로 간 카센터에서 직원이 추근대서 도망다니고 학비 늦게 내서 75달러 내고 입금 잘못해서 100여 달러 손해보고 페이팔 잔고 부족해서 70달러 또 추가로 내고 치즈버거세트 시키다가 버거 3개 받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장 큰 건 각막염이었는데 라섹부작용으로 각막에 상처가 난 거(이건 2년 전부터 만성임)에 추가로 감염이 돼서 병원비로 300달러 가까이 나가고 일주일은 운전할 때 빼고는(눈감으면 내가 죽으니까) 눈을 부여잡고 살았다. 뭐 그래도 한 학기 무사히 지내고 나니까 추억이고 그렇다.

다음 학기는 과목이 하나 줄어드니만큼 어떻게든 주4파로 우겨넣고 3일을 숙제에 올인하는 스케줄을 만들고 싶었는데 ESL이 월수를 철통방어하는 바람에 아옼ㅋㅋㅋㅋ 진짜 유학의 저주다 이놈의 ESL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한 학기 삽질한 만큼 좀 덜 삽질하면서, 그래도 스스로에게 실수를 허용하면서 즐겁게 다니는 게 2학기의 목표!